12월 5일부터 8일까지 제주도 중문 롯데호텔에서 열리는 ICAUMS 2010을 다녀왔다. ICAUMS란 'International Conference of AUMS (The Asia Union of Magnetic Societies)'의 약자로, 뜻은 '아시아 자기학회 연합 국제학회' 정도가 되겠으며, 읽는 것은 이카움스라 한다.
3박 4일의 아름다운 제주도 여행이라 볼 수 있겠지만, 첫날은 저녁 비행기 출발이라 사실상 2박 3일에,학회라는 것이 본래 오전-저녁 풀로 하기에 여행이라고 하기엔 시간이 없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연사들이 빵빵하다 싶더니, 둘째 날에 한국자기학회 총회를 여는 한편, 외국인들에게 제주도를 관광하라고 자유시간을 오후 1시에서 6시까지 주었다. 뭐, 그래밨자 이 날은 매우 추웠고 바람이 불어, 사실상 제대로 된 관광은 하기 힘들었지만.
그래서 관광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이게 왠걸, 같이 참석한 연구실 형이 2011년 4월에 포닥(Post Doctor)으로 '테루오 오노'라는 일본인 그룹에 합류할 계획이라, 마침 이카움스에 참석한 그들을 꼬셔서 같이 제주도를 관광하도록 권한 것이다!
덕분에 마음편하게 아무 준비도 하지않고 그 추운날 반팔에 츄리닝을 입고 간 나는, 뭔가 혼자 덜떨어진 사람처럼 되었다. 게다가 일본인들, 학회에 가보면 죄다 정장이나 깔끔한 가디건 차림인데 나혼자 츄리닝이라니.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게임을 하다보니 어느덧 어느정도의 일본어 리스닝이나 일상대화가 가능해진 나로써는 두근거리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일본 애니메이션만 몇년동안 봤지만 일본에 한 번도 가지못한 나로써는 직접 일본어를 쓸 기회가 없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나 정도의 수준으로 학회에서 일본사람에게 학문적 토론을 한 다는 것 자체도 웃긴일이고. 하지만 여행이라면 은근슬쩍 말하는게 되지 않을까?!
시간은 다가왔고, 멤버들은 모였다.
に-じげん にんげん(니-지겐 닝겐: 2-차원 인간)?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쿄토대 교수 '테루오 오노(Teruo Ono)'와 그 밑의 박사과정 '코우타 콘도우(Kouta Kondou)', 교토대 교수 '세키구찌(K. Sekiguchi)', 도쿄의 UEC(University of Electro-Communications)의 교수 '요시노부 나카타니(Yoshinobu Nakatani)' 밑의 박사과정 '토모노리 사토(Tomonori Sato)', 그리고 또 한 명있었는데 기억이 애매하다. 우리 쪽은 한국인 6명.
렌트카를 빌려서 여행을 했는데, 시간상 그리고 날씨상, 그리고 한국에 처음오는 사람들 있기에 자연경관을 보여줘야한다는 제약덕분에 가능한 곳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 내에 점심과 저녁도 해결해야 했으니.
일단 점심을 해결하러 뭔가 유명한 갈치집을 갔다. 이름은 기억나질 않는다. 평소라면 찍었을 사진도 찍지 않았다. 먹으면서 맛도 못 느꼈다. 갈치회는 고등어 회와 달리 느끼하진 않구나 정도는 느꼈다만. 특이한 건 일본인들이 매운 것을 정말 못먹는다는 것과 (갈치 조림이 맵다니!), 일본에서 넘어왔다는 고추를 생으로 된장에 찍어먹는 한국인에 경이로움 마저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
그런데 식당가는 렌트카 안에서 계속 더듬더듬 영어로 대화하다가, 식당 밖에 나오면서 사토씨가 자기가 한국말 어느정도 안다면서 한국말을 하길래, 칭찬하면서 "와따시모 니혼고 조또 데키마스, 게이무토카 아니메데(나도 일본어 조금 할줄 알아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으로)" 라고 말해줬더니 상당히 반기더라. 특히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보이길래, 일단 본인이 존경해마지 않는 Production IG의 <공각 기동대>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인랑>을 대니깐 좀 오래된 작품이네 그러면서 "프로덕션 IG와 쓰고이(Production IG 는 매우 좋다)"라고 그러길래 뭔가 나도 기뻤다. 나도 고등학교 애니메이션 클럽 부기장 맡은 이후로 따로 애니메이션 동아리에는 들지 않고 온라인에서도 딱히 의견을 나누는 일은 없었기에, 즉 이런 애니메이션 관련된 이야기를 할 일이 없었기에 일본어 반 영어 반으로 말하는 애니메이션 이야기가 너무나 즐거웠다. 게다가 사토씨도 PS3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란투리스모 5>를 하고 있으며 레벨 12라고 하더라.
그런데 이야기 도중에 앞에서 한 사람이 장난스럽게 스쳐가는 말을 한 것이 있으니, 제목에서 밝힌
"니지겐 닝겐(2차원 인간)?"
이다. 오타쿠보다 모욕적인 말인 것 같아서 이때 쫌 거슬렸고, 그래서 그 뒤로 이 이야기를 자제했다. 하지만 이 대화는 결국 나중에 또다른 사건을 일으키는데..
제주도는 사실 이번이 3번째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특히 물리학부 졸업여행으로 제주도를 갔을 때, 내가 여행을 주도한 만큼 내가 안가본 곳 중 가보고 싶었던 곳을 중심으로 선택했었기에, 더하였다. 하지만 정방폭포는 정말 압권이었다. 가길 잘했지 암.
정방폭포는 바다 끝에 있는데, 입장하는 곳 주변에 제주도의 명물이라기엔 이제 지겨울 지경인 감귤 초콜렛과 백년초 초콜렛을 팔았다. 그리고 쪼맨한 귤도 팔았고. 그런데 일본인들 이런 것에도 엄청 좋아하더라. 확실히 한국사람 시점에서 고려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백년초 초콜렛을 설명하기 위해 사보텐더(선인장: 사실 이 단어는 <파이널 판타지 13>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초콜렛이라 그러니깐 얼마나 신기해 하던지. 쪼맨한 귤도, 자신들이 알던 제주도 귤과는 다르게 너무 달다면서 좋아하더라. 음...그렇지 한국에 있는 일식집치고 괜찮은 곳 많지 않듯, 일본에서 파는 한국 음식도 다르지 않겠지. 아니면 그전에 제주도에서 사기를 당했다거나.
정방폭포 보러 내려가는 길에 한 고양이를 만났다. 자기가 모델인양 사람이 다가가도 피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며 포즈를 취하더라. 여기서 일본인들이 고양이를 얼마나 좋아하는 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번에 별로 없는 사진에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은 본인이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것도 말해주지만.
그리고 도착한 정방폭포! 천지연, 천제연 폭포와 더불어 제주도 3대 폭포 중 하나로, 산에서 절벽을 통해 바로 바다로 떨어지는 폭포가 일품이다. 특이하게 정방폭포에는 진시황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는데,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으러 온 '서불'이라는 사신이, 정방폭포의 아름다움에 흠뻑빠져 '서불과차'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가 서쪽으로 갔다하여 지명이 '서귀포'라 붙여졌다고 한다. 진시황과 관련된 전설은 일본에도 많은 것 같던데, 당시에 지식이 없어 못 물어본게 아쉽다.
일본인들은 정말 좋아했으며, 나도 좋아했지만, 그모습을 보며 왜 유명한 관광지가 유명한지 깨닫게 되었다. 사실 나는 가봤자 뻔한 폭포라 지겨우니 카트나 타러 가자라고 몇번 운을 띄웠었는데,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참 이와중에 오노 교수와 세키구찌 교수는 정말 잘 놀더라. 코코넛에 빨대 두개 꽂아서 러브샷도 하고 말이다. 학생위에 교수, 그위에 대선생님이 있는 수직적이고 파벌지향적인 '사제제도'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라 들었는데, 오히려 한국 교수님들보다 비권위적이고 학생들과 장난을 잘 치더라. 아까 식당에선 맞담배도 피고, 덕분에 나도 같이 맞담배도 폈다.
그리고 가는 길에 'Shelter'(대피소)라는 표지판이 있길래 오노 교수가 나에게 저게 정말 대피소냐고 물어보길래, 맞다며 한국은 항상 전쟁에 대비해 저런 것이 있다고 하니 정말 당혹스러워 하였다. 아까 맞담배 필 때, 군대에 관한 이야기도 들으면서 'Crazy'를 연발하더니, 확실히 다른 나라 사람에게 전쟁이란, 혹은 군대는 멀게 느껴지는 것인가 보다.
일출랜드-미천굴: 그렇다고 모든 관광지가 괜찮은 건 아니다
다음 코스는 시간과 거리상 어쩔 수 없이 미천굴이 있는 일출랜드로 가게 되었다. 본인은 앞서 언급한 졸업여행으로 여름에 일출랜드를 와바서, 미천굴은 볼 것이 없지만 일출랜드는 나름 놀만하다고 알고 있었기에 별 걱정 안했는데, 역시 문제는 추위.
추위때문에 사람도 없고, 나름 볼만한 바닥분수도 안하고, 뭔가 훌빈하고, 그나마 따뜻한 미천굴은 용암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사실 깊은 곳은 막아놔서 볼 것은 없고. 용암이 지나가면서 만들어진 굴이라 지하수로 인해 만들어진 굴처럼 볼만한 석주같은 것도 없어, 인위적으로 조각을 만들어놨는데, 이건 오히려 역효과. 일본인들도 많이 실망했다.
그래서 전통 악기치는 곳이나, 그 화살 던지는 전통놀이로 달래려 했더니, 날씨가 추워서 이도저도 안되는 상황. 후다닥 저녁먹을 곳을 향할 뿐이었다.
저녁시간: "Korean otaku, You are a master and he is the grand master."
저녁은 Half-Plenary Talk를 하기 때문에 시간에 쫓겨 롯데호텔 근처의 관광객 대상으로 하는 큰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는 흑돼지 먹기로 했었지만, 일본인들이 흑돼지를 전날 저녁에 먹어서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흑돼지를 시켰다. 오, 그런데 관광객 대상으로 하는 가성비 나쁜 식당임에도 역시 흑돼지는 맛있었다.
신기한 것은, 일본인들이 그 전날에 먹었음에도 맛있어 하더라는 점이다. 알고보니 그전에 간 식당이 구워주는 것을 self로 해서 그런 것. 사실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고기집이 셀프로 구워야 하기에, 사람마다 고기 구울 줄 알고, 특히 회식자리에서 잘 굽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법이다. 하지만 일본은 대부분 직원이 구워주는 지, 하긴 일본에서는 돼지고기를 양념없이 구워서 잘 안먹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자기네들이 뭐가 익은건지 몰라서 제대로 못먹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고기굽기 요원으로 투입되었고, 나는 고기를 아주 못굽는 편임에도 일본인들은 만족해 주었다.
그 후에 소고기도 시켰는데, 소고기는 별로 맛이 없었다. 그래도 일본인들은 좋아하더라만. 또 특별한 점이라면, 일본인들 해물탕을 무지 좋아한다. 특히 조개를 무지 좋아한다. 아니 해물탕 조개를 무슨 쥐잡듯이 후루룩 낚아 채서 먹는 사람들 처음 봤다.
고기가 들어가니 당연 술이 들어가는 법. 일본인들은 맥주를 무지 좋아했는데, 회먹을 때도 맥주, 고기먹을 때도 맥주였다. 그러다가 좀 술 드실줄 아시는 분이 소주를 먹자고 해서 먹었는데, 도수가 낮아져서 그런지 일본인들은 '아마사케(단 술)' 같다면서 또 좀 먹더라. 나중에 오신 나가타니 교수는 이왕 온 김에 다 시켜먹어보자면서 온갖 막걸리를 다 시켰는데, 정말 잘마셨다. 난 일본인들은 그냥 정종이나 마실 줄 알았더니, 술을 정말 즐기면서 마시는 듯 하였다. 우리나라처럼 원샷하는 습관도 없으니 조금조금씩 이야기하면서 술술 비운다. 본인은 술을 좋아하여 원샷은 아니더라도 투샷정도로 조절하는데, 이렇게 먹어도 꽤 괜찮았다.
술기운이 살살 도니, 일이 발생했다. 사실 그렇게 큰 일은 아니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갑자기 오타쿠 어쩌고 이야기가 나왔고, 나보고 손으로 가리키며 코리안 오타쿠라고 하였다. 필시 내 취미를 아는 선배형들이 말하였으리라. 그리고 순식간에, 나를 주위로 오타쿠 집단이 형성되었다.
응?
같이 먹은 7명의 일본인 중 5명이 오타쿠스러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오타쿠보다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누가 무슨 애니메이션을 보냐길래, 아까 전처럼 오래된 사람 취급받지 않기 위하여 <그래도 마을은 돈다>와 <아리카와 언더 더 브릿지>를 요즘엔 보고 있다고 말하니, 정말 좋아했다. 그런데 두 애니의 감독인 '신보 아키유키'나 제작사 '샤프트'는 또 모르고 있었다. <바케모노가타리> 이야기를 하니 한 명이 "아~!" 감탄사를 보였지만. 하긴, 우리나라 한국 드라마 좋아하는 사람도 출연진은 알아도 제작사나 감독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그런데 <에반게리온>이야기가 나오길래 내가 BD샀다니깐 또 엄청 놀랬다. 그리고 흰머리의 마흔 후반의 나가타니 교수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며, 2.22 맞냐고 물어보길래 맞다고 그러며 한국의 BD는 2000엔 가량으로 싸다고 말해줬다. 그러니 얼굴색이 변하며 근처에 BD 판매점을 가르쳐 달라고 막 조르기도 하였다.
그때 세키구찌 교수가 말해줬다.
"Korean otaku, you are a master and he is the grand master."
그러자 주변의 콘도나 사토씨도 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단하다고 연신 그러더라. 그러자 그 마흔 후반의 그랜드 마스터는 'AKB48'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뭐 원래는 다른 쪽에서 나오던 이야기를 받은 것이지만. AKB48란 48명짜리 일본 최고 인기의 아이돌 그룹이다. 내가 중간에 한국 오타쿠 사이에는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에 출연한 성우 '미즈키 나나'가 유명하다고 하니,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AKB48 이야기를 하는데, 공연중 마이크 배치가 바뀌는 등 그들의 퍼포먼스에 대해 정말 열정적으로 강의하였다.
뭐 그분의 말에 따르면 한 멤버가 비행기에서 낙하하며 노래를 부르고 그것에 따라 지상에 있는 다른 멤버가 불렀다던가? 그러면서 과학 실험은 이렇게 해야한다고 열변을 토하셨다.
그외에도 많은 말을 일본어로 하셨기에, 난 그냥 "쓰고이 쓰고이"를 연발하며 대충 맞춰줬다.
참, 뭔가 뿌듯했던 일은, 앞서 말한 것처럼 사토씨도 나처럼 PS3를 가지고 있고 <그란투리스모 5>를 하고 있는데, 차체 데미지가 레벨 20과 40때 언락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인이 모르는 일본 게임의 정보를 일본인에게 설명하니 일본인이 놀라는 모습이 너무 재밌었다. 나름 하드코어 레이싱인 <F-1 2010>도 하는 게이머인데. 혹시나 해서 PSN ID를 알려줄 수 있냐고 하니, 당황하면서 자기 누나의 남편의 콘솔이라며 미안하다고 했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줄은 몰랐나?
그리고 놀랐던 일은 니혼이치 소프트웨어의 중독성 강한 노가다 게임 <마계전기 디스가이아> 시리즈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내가 너무 코어한 것이었나. 뭐 그사람 말을 들어보니 사토씨 취향은 <바이오 하자드>와 같이 약간 서양틱한 게임이고, 난 반대이니.
그리고 한국에 '호시노 루리'의 이름을 딴 '루리웹'이라는 비디오 게임 커뮤니티 덕분에 정보를 안다고 하니, 바로 <기동전함 나데시코>라고 말하길래, 나데시코의 위엄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막 떠들고 헤어져서 정신차려보니, 형들은 내가 오타쿠인 것에 자랑을 느꼈다며 농담반 진심반의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정말 많이 떠들긴 하였나 보다. 하여간, 나의 오타쿠가 일본에도 어느정도 통한다는 사실에 뭔가 뿌듯함과 동시에 자괴감을 느꼈고, 일본 연구자들에 애니메이션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점점 일본으로 포닥을 가고싶다는 생각이 들게한, 그런 학회였다.